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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제니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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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제167대 교황. 최초의 시토회[2] 출신 교황이다.
에우제니오 3세는 재위 기간 동안 로마에 제대로 머무르지 못했다. 본래 로마는 교황의 통치 아래에 이루어져야 하지만, 아르날도 다브레시아를 주축으로 구성된 반교황파가 옛 로마 법률을 부활시켜 로마를 다스리는 공화정 조직인 로마 코뮌을 세우고 시민을 대표하는 통치자로 조르다노 피에르레오니를 선출했기 때문이다. 교황은 티볼리 지역과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 루제루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들의 지원으로 일시적으로나마 교황권의 힘을 키웠다. 이에 로마 코뮌은 1145년 12월 교황이 로마에 들어와 성탄절을 보낼 수 있게 허가했다.
1144년 십자군 국가 중 하나인 에데사 백국이 무슬림 군주 이마드 앗 딘 장기에 의해 멸망하자, 에우제니오 3세는 1145년 제1차 십자군 원정 때의 영광을 재현하고 성지를 지키기 위한 십자군의 결성을 촉구하는 내용인 <얼마나 많은 전임자들께서(Quantum praedecessores)>라는 칙서를 프랑스 왕국의 국왕 루이 7세에게 전달해 새로운 십자군 원정을 촉구했다. 그러나 제1차 십자군 원정 초기 때와는 달리 십자군 결성에 대한 열의가 그리 높지가 않자, 교황과 같은 시토회 소속 성직자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가 직접 나서서 십자군의 성스럽고 명예로운 의의에 대해 설파하기 시작했다. 베르나르도의 진심 어린 호소로 인해 루이 7세와 프랑스 왕국의 수많은 영주들,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콘라트 3세와 귀족들이 십자군 참가에 서약했다.
2. 선종과 시복[편집]
비록 로마 시민들은 에우제니오 3세를 세속적인 지도자임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자신들의 영적인 지도자임은 항상 인지하고 있었고, 그의 개인적인 인품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다. 이로 인해 에우제니오 3세가 선종하자, 교황에 대한 존중의 표시로 시신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시간이 흘러 에우제니오 3세의 무덤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기적적인 치유가 일어난 성스러운 장소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에 1872년 교황 비오 9세는 이러한 기적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에우제니오 3세를 시복했다.